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배층이 사회를 얼마나 개방했느냐 아니면 기득권끼리만 폐쇄적인 구조를 고수했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골품제는 타고난 혈통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극단적인 폐쇄성을 보여준 제도라고 생각한다.

골품제는 관직의 승진 한계를 정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집 크기는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등 일상생활 정체를 빽빽하게 규제하여 사회를 획일화했다고 생각한다.

신라 법흥왕 때 정비된 ‘노인법’은 왕경에 살지 않는 지방민들을 차별하고 노예처럼 다루는 도구로 작동했다.

이러한 꽉 막힌 신분제는 시라 말기에 극심한 왕위 쟁탈전과 전국적인 내전을 불러왔다.

결국 지방에서 독자적인 힘을 키운 호족들과 신라 신분제의 벽에 부딪힌 6두품 지식인들이 손을 잡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으나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최치원, 최승우 같은 6두품 엘리트들은 신라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지방의 장군과 성주들을 찾아가 동맹을 맺었고, 이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원동력이 되었다.

위와 같은 신라의 폐쇄성이 만든 혼란을 극복하고 세워진 고려는 초기에 사회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태조 왕건은 나라가 망해 떠돌던 발해와 고구려 유민들을 받았고, 지방 호족들을 배척하는 대신 결혼과 성씨 하사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연합 체제를 구성했다.

또한 광종은 과거제를 도입했다. 과거제는 부모의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학문적 실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뽑는 제도였다.

이를 통해 고려는 신라의 진골 귀족 같은 폐쇄적인 특권층을 무력화하고, 전국의 호족 자제들을 중앙 관료로 흡수하며 지배층의 범위를 넓히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갔다.

하지만 고려 전기의 정치가 안정되면서, 권력을 잡은 문벌귀족이 나타나 사회를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실력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이 아닌 공음전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또한, 문벌귀족간의 정략결혼을 맺었다. 이러한 문벌귀족 사회는 왕실의 장인이자 할아버지로서 권력을 휘두른 이자겸이 일으킨 이자겸의 난과, 개경 보수 귀족에 맞서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며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라는 내부 분열로 이어졌다.

문벌귀족 이후에는 군인들의 반발로 지배 무신 체제로 바뀌었다. 고려의 과제 제도는 글공부하는 문관들만 우대했고, 무신을 뽑는 시험은 없었기에, 군인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존재했다. 결국 무신들은 무신정변을 일으켜 문벌귀족을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무력만으로 나라를 다스린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략과 원나라의 간섭 속에서 나라 전체가 해체되는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역사가 알려주는 교훈은 권력을 잡은 기득권층이 사회를 개방하지 않고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폐쇄성을 고수할 때, 그 사회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거나 정변을 통해 뒤집어진다는 것이다. 제도를 열어두고 실력 있는 인재를 공정하게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조건임을 알 수 있다.